12년 전 죄인처럼 쫓겨나듯 떠났던 그가 해냈다, 유광점퍼 염원과 한풀이 이뤘다[KS]
작성자 정보
- 토토힐 작성
- 작성일
컨텐츠 정보
- 4,127 조회
- 0 추천
- 0 비추천
- 목록
본문
[스포츠서울 | 잠실=윤세호기자] 암흑기 종착역이었다.
작은 한마디도 사건·사고로 번지면서 이른바 암흑기 원흉이 됐던 시기다.
오해가 눈처럼 쌓여 구단 비선 실세라는 억측과 마주했다.
2011년 LG 염경엽 수비 코치가 그랬다.
그래서 마치 죄인처럼 팀을 떠났다.
사실상 죄인이었다.
2011시즌 내내 유니폼에 자리한 자신의 이름이 보이지 않게 점퍼를 걸치곤 했다.
한여름에도 그랬다.
오해와 억측이지만 10년 동안 하위권에 자리한 팀 성적과 맞물려 비난의 화살이 그치지 않았다.
당시 구단주의 해외연수 권유를 정중히 거절하고 히어로즈로 떠났다.
12년이 지났다.
긴 시간만큼 참 많은 일이 있었다.
현대 시절 프런트 말단 직원부터 스카우트, LG 운영 팀장, 1군 수비코치와 히어로즈 주루코치를 맡은 그는 2013년 히어로즈 사령탑이 됐다.
감독으로는 성공과 실패를 두루 경험했다.
약체 히어로즈를 포스트시즌 단골로 만들었지만 떠나는 과정에서 온갖 소음이 터져 나왔다.
2017년 SK 단장으로 부임해 2018년 한국시리즈(KS) 우승을 이뤘다.
그러나 이듬해 SK 감독으로 악몽과 마주했다.
당연할 것 같았던 정규시즌 우승이 페넌트레이스 마지막날 무너졌다.
KS 직행이 아닌 플레이오프(PO)부터 가을야구 무대에 올랐고 자신과 함께했던 히어로즈 선수들을 상대로 맥없이 물러났다.
2020시즌 초반에는 경기 도중 실신해 어쩔 수 없이 팀을 떠났다.
그렇게 끝나는 것 같았다.
미국 연수 후 KBO 기술위원장, 방송사 해설위원을 맡았으나 감독으로 돌아오기는 쉽지 않아 보였다.
하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지난 2년 동안 부지런히 자신을 돌아봤다.
그리고 2022년 11월초. 플레이오프 패배 후 베테랑 감독을 선임하기로 한 LG 구단주의 눈에 들어왔다.
염경엽 감독 본인조차도 예상하지 못했던 20대 LG 트윈스 사령탑이 됐다.
LG 지휘봉을 잡은 그는 “대학생 시절에는 프로야구 선수가 되겠다는 마음이 없었다.
그러다가 우연히 친구들과 잠실구장에서 LG와 해태의 경기를 보게 됐고 마음이 바뀌었다.
프로 무대가 얼마나 멋진지 그때 알았다”며 “이 멋진 팀에서 꼭 우승을 이루겠다.
내 꿈도 우승 감독이다.
우리 구단의 꿈을 실현시키겠다”고 다짐했다.
대반전 드라마의 시작점이 이렇게 찍혔다.
염 감독은 “감독하면서 너무 자만했다.
그래서 하늘이 벌을 내렸다.
벌을 달게 받았다”며 “2년 동안 많이 공부하며 준비했다.
어쩌면 한 번 더 감독이 될 수 있다는 믿음으로 반성하고 준비했다.
과감하고 당당한 야구, 팬들에게 즐거움을 드리는 멋진 야구를 펼치겠다”고 약속했다.
약속은 현실이 됐다.
LG는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닌 팀’이 됐다.
지고 있어도 지지 않았다.
정규시즌 42번의 역전승을 이뤘다.
경기 초중반 포기한 경기가 손에 꼽을 정도로 끝까지 상대를 물고 늘어졌고 결국에는 뒤집었다.
144경기 마라톤에서 종착역에 닿기도 전에 1위를 확정지었다.
KS에서도 그랬다.
이대로 끝나나 싶었던 2차전 1회 4실점. 하지만 준비해둔 중간 투수 인해전술 전략을 펼쳐 드라마를 만들었다.
3차전 8회 박병호에게 홈런을 내주는 순간 마주했던 패배의 두려움도 9회 오지환의 스리런포로 극복했다.
이전까지 LG에 절실함은 곧 부담이었다.
이제는 절실함이 과감함과 당당함이 됐다.
그렇게 약속했던 유광점퍼의 염원을 이뤘다.
1994년 LG 통합우승 후 11명의 감독(천보성 이광은 김성근 이광환 이순철 김재박 박종훈 김기태 양상문 류중일 류지현)이 이루지 못한 정상 등극이다.
12년 전 감독은커녕 유니폼을 입은 모습조차도 보일 수 없었던 그가 한 편의 영화를 완성했다.
[email protected]
<본 콘텐츠의 저작권 및 법적 책임은 스포츠서울(www.sportsseoul.com)에 있으며, 토토힐는 제휴를 통해 제공하고 있습니다.>
관련자료
-
서명토토힐 운영자
댓글 0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